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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을 건넌 후 첫 싸움 (수 6:1-7)

 

                                                       2022년 7월 17일 주간목장교안

20220717 목장교안.hwp

20220717 목장교안.pdf

 

 

   

   1. 설교의 시작 부분에서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 번 헤아려 보았다. 적 앞에서 그것을 행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한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유가 있는 명령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싸워야 할 싸움이 단지 땅을 차지하는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땅을 위한 싸움에도 믿음이 필요하다. 무장도 빈약하고 경험도 부족한 상태에서 싸워야 할 때 두려울 수밖에 없지만, 이 때 그들이 밟는 땅을 이미 다 그들에게 주었다는 말씀을 믿을 때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땅을 위한 싸움은 어떤 점에서 쉬운 싸움이다. 왜냐하면 그 싸움은 그들이 보기에도 이길만한 도구와 전략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칼을 사용하는 그들을 이기기 위해 이스라엘도 칼을 사용하는 것이다. 적들이 찌르듯 이스라엘도 찌르는 싸움이다. 검과 몽치를 들고 온 자들에게 나도 칼을 빼어 귀를 베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차지한 땅 위에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따르는 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어렵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회를 개척해서 교인들이 모이고 그래서 부지를 마련하고 마침내 자기 건물을 가지는 것은 (어렵지만) 오히려 쉬운 일이다. 그 일은 세상처럼 경영학적 기법을 차용하고, 재테크를 동원하여 적당하게 믿음을 더함으로써 성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들도 다 쓰는 전략을 써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형성된 공간과 무리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 정신을 따라” 남다른 사회를 세우는 일은 어렵다. 그 싸움에는 정말 큰 믿음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 길은 다 너무나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는 망할 것 같고, 손해 볼 것 같고, 질 것 같고 그래서 결국 어리석고 바보 같이 될 것 같은 길”이기 때문이다. 

   신약적으로 말하자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고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것과 같다. 이것에 비하면 땅을 차지하는 것은 오히려 쉽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싸움에 앞서서 적 앞에서라도 할례를 행하라고 한 것이다. 이 싸움에는 더 큰 믿음의 결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질문) 당신은 오늘 이런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마음 깊이 공감하는가? 우리가 왜 늘 이렇게 실패하는지 이해되는가? 이 땅의 교회가 그렇게들 신속하게 성장하고 멋지게 건물을 짓고도 결국 무너지는 이유를 알겠는가? 이 땅의 교회들에 2% 부족한 게 무엇인지 보이는가?

 

  2. 본문은 여리고성 정복 전쟁이다. 아직 T.V.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전국 교회 주일학교의 단골 메뉴였던 이 본문은 너무나 재미있는 본문이지만 자칫 동화처럼 여겨질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고고학적 증거들로 뒷받침되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이야기를 동화처럼 치부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 메시지는 엄청난 피흘림을 통해 기록된 것임을 기억하고 진지하게 읽어야 한다. 

나눔) 서로를 위해 다음 조각들을 가지고 그 날의 설교를 다시 복원해 보라 ①성의 광범위한 붕괴 흔적과 수6:5절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②내성벽과 외성벽 사이 경사면에 소외계층의 거주 – 기생 라합의 집이 성벽 위에 있었다는 언급 ③항아리에 가득한 곡식에 관한 해석 - <전쟁의 시기> <지속기간> <물건에 손대지 말라는 명령> 

 

  3. 여리고성 전투가 주는 교훈 ➀ : 요단을 건너는 게 목적이 아니다. 계속 싸워 나가야 할 싸움이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죄사함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게 목적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을 건너며 가지고 나온 돌 열두 개로 기념비를 세웠다. 하지만 여리고성 싸움은 무얼 말해 주나? 하나님은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여 감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늘 그 얘기만 하면서 거기 머물러 있는 것도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 땅으로 전진해 들어가기를 원하시며, 그것은 그들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오늘날의 표현으로 바꾸어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계속해서 그 구원의 은혜를 반영하는 관계와 삶을 구축하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늘 “날 구원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라고 하면서 홀로 감사헌금을 드리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말이다. 단지 감사헌금이 아니라 복음으로 사는 삶, 복음으로 세워가는 관계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그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하고도 그 목적을 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삶 속에는 종교적 행위만 무성했다. 그 은혜를 반영하는 관계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그 땅에서 쫒겨났다. 

 

질문)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이 땅에서 교회가 하나님 나라 모델하우스로 세워지는 것을 등한히 한 채 구원의 은혜만 노래하는 교회를 주님은 어떻게 바라보실 것이라고 여겨지나? 우리는 어떤 작은 노력이라고 해 보았으면 좋을까?

 

  4. 여리고 전투가 주는 교훈 ➁ : 첫 싸움이 이렇게 견고한 성벽을 정복하는 것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후, 진정한 신자의 삶을 누리는 자리로 나아가려 할 때 우리에게 부딪히는 저항은 대단히 크다는 것이다. 그 싸움은 누구에게나 있으며, 첫 싸움은 늘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싸움이라는 것이다. 어찌 그렇지 않겠나? 그들에게는 하나님 없이 살아오던 오랜 습관이 있고, 오랫동안 맺어온 관계가 있고 그 안에서 즐겁게 살아오던 방식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신자에게 약속된 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것을 꼭 넘어서야 한다.  

 

질문) 당신에게는 무엇이 당신의 여리고인가? 당신이 예수 믿고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무엇이었나?  예수를 더 잘 믿기로 결심할 때 마음을 짓누르고, 두렵게 하는 게 무엇인가?

  

  5. 나의 여리고 성을 정복하지 않고는 신자에게 약속된 기쁨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자신도 신앙이 좋아지기 원하고, 그런 사람들이 누리는 특권, 평안함과 담대함과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한다고는 말하면서도 마땅히 싸워야 할 싸움은 싸우지는 않는다. 부럽다고만 할 뿐 그리스도인의 더 풍성한 삶을 방해하는 자신의 여리고성과의 싸움은 싸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의 젖과 꿀도 맛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10년, 15년째 요단강과 여리고 사이에 머물러 있다. “나도 새벽기도 가고 싶어요!”라고 하면서도 밤늦게까지 TV 드라마 보는 일은 결코 그치지 않는다. 

 

질문) 당신의 여리고 앞에서 당신은 어떤 행동을 보이고 있는가? 그 성을 돌파하기 위해 당신이 이번 주간에 결심해야 할 일은 뭔가? 

 

6. 여리고성 전투를 치르는 방식은 단순하다. 앞에서 제사장들이 양각나팔을 부는 가운데 언약궤를 앞세우고 매일 성을 한 바퀴씩 도는 것이다. 그러다가 제 칠 일째에는 일곱 번 돌고 마지막엔 함성을 지르는 것이다. 이 지시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일곱이라는 숫자가 너무나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6장 4절은 그 예다. “수6: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그들은 이 명령을 수행하면서 계속해서 일곱이라는 숫자에 신경을 써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일곱”수는 하나님의 수임을 안다면, 이는 그 싸움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싸움이라는 말이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결국 그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그들은 다만 말씀에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 걷는 동안 그들은 어떤 소리도 입 밖으로 내어서는 안 되었다. 참 어려운 명령이다. 이 명령에는 불평할만한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그렇게 많이 걷고 왔는데 또 걸으라는 것도 불평할만한 일이고, 더구나 걸어도 하루하루 어떤 변화나 결과를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은데, 그런 변화도 없는 데 걸어야 하니 그 일도 어렵다. 아무 말도 않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말도 하지 말고 걸으라는 것은 그들에게 각자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으로 말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특별히 그들이 침묵할 때 그들의 귀에는 제사장들이 언약 궤 앞에서 부는 양각 나팔 소리가 더 잘 들릴 것이다. 양각 나팔 소리는 양의 뿔로 부는 소리로 양이 죽음으로써 남겨진 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과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우리 앞의 여리고와 싸울 때 우리 안의 속 소리들을 내려놓고 주님의 복음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특별히 거기에 남다른 공동체를 세우려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그 십자가의 복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앞에 우리의 속 소리와 불평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질문) 당신은 지금 당신의 여리고성을 어떻게 정복하려 하는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것을 돌고 있나? 아니면 아예 그런 것을 다 꺼 놓고 당신의 말만 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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