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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 실제 상황 속에서 증발하다 (창 29:1-14상)
                                                                  2022년 7월 24일 주간목장교안
                                               
20220724 목장교안.pdf 20220724 목장교안.hwp

 
   1. 꼼수와 거짓말로 형의 장자권을 빼앗고, 형을 위한 축복기도까지 가로챈 야곱은 결국 그 일로 더 이상 형과 같은 공간에 살 수 없게 되어 긴급히 하란으로 도망가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을 베델에서 만나주시고 야곱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상속자임을 확인해 주셨다. 그리고 그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야곱을 지키고 보호하시고 함께 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렇다면 이런 축복을 받은 사람의 인생은 그 후 어떻게 펼쳐지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아주 평탄한 인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가르치는 설교자도 많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성경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게 약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꾸 그렇게 생각한다. 왜 그럴까? 부르심의 목적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사람들 가운데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우리를 아프지 않게, 혹은 고난과 시련을 겪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상숭배자들과 같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를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천국 백성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나라에 맞게 하나님을 닮은 자로 빚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질문) 당신은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의 안녕과 번영인가? 하나님이 단순히 당신의 번영이 아니라 거룩함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하나님의 자녀답게 빚으시기 원하신다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가?

   2. 예수 믿는다고 하나님이 당장 좋은 일만 일어나게 하실 수 없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 그 사람의 인격과 삶에서 갈아내야 할 부분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시련은 허용된다. 물론 그 외에도 ‘문제 많은 그 사람’은 ‘그 자신의 문제로 인하여’ 늘 잘못된 선택을 계속함으로써 스스로 고난을 자초한다. 그 인생이 계속 꼬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거나 보호하신다는 약속은 뭔가? 그 약속은 ‘결코 어려움이 생기지 않게 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어려움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어려움 중에 홀로 두지 않겠다. 그 어려움 중에 너와 함께 하겠다’는 말이다. 어려움 중에 함께 하시면서 나를 발견하게 하고, 그 안에서 내가 다루어지고 변화하고 성장하게 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과정 내내 함께 하시면서, 그 고난과 시련이 우리를 빚어가게는 하되, 파괴하지는 못하게 하신다. 마침내 우리를 향한 하나님 자신의 계획이 이루어지게 하시겠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말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도 그런 뜻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늘 그랬다. 모세나 여호수아의 인생에서도 마찬가지다. 모세에게 불 붙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르신 것도 그와 같은 메시지다. 하나님이 불 같은 시련 속에서도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그럴 때 모세는 그 불에 의해 소멸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도 말씀하셨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게 하라.” 여호수아의 앞길에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을 거라는 말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여호수아와 함께 하신다. 또 이는 훗날 유다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과도 같다.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에게 포로로 내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 43:2).” 그들에게 감당할 수 없을 그런 시련, 물과 같고 불과 같은 시련을 허용하시지만, 주님은 그 시련 가운데서도 “침몰하지 않게... 타지도 않게...” 지키신다는 것이다.

질문) 평소 당신이 생각해 온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보호하심’은 어떤 것인가?” 말해 보자! 그리고 이제 당신은 당신의 평소 이해를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가?

   3. 그렇다면 각종 시련 앞에서, 신앙을 가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부드러운 위로의 말일까? 아닐 것이다. 말의 위로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우리를 버티게 하는 근본적인 힘이 될 수는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두텁게 하는 것이다.

질문) 그런 점에서 당신은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을 두텁게 알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나? 머리로만 알아가는 것은 아닌가? 기도하며 관계로 나아가는가?

   4.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야곱과 같은 사람을 찾아오시고 또 어디로 가든지 야곱과 함께 하고 또 지키겠다고 하신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사실 성경에서 야곱은 뼛속 깊이 거짓이 새겨진 존재다. 불공정과 거짓말은 거의 야곱의 DNA(야곱을 결정하는 유전인자)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셔서 일평생 야곱과 함께 하겠다고 하셨다.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 야곱과 무슨 볼 일이 있겠는가? 야곱과 무엇을 함께 하실 수 있겠는가? 그런데 생각해 보면 바로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희망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야곱처럼 거짓과 부정의로 얼룩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질문) 당신은 야곱의 하나님이 당신의 하나님인 것을 감사하는가?

   5. 그렇다면 생각해 보자. 그런 공의의 하나님이 야곱 같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그 함께 하심은 어떤 것이겠나? 하는 일마다 잘되게 하는 방식이겠나? 판을 벌이는 대로 잘 되는 것일까? 그런 뜻일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시련을 허락하시면서, 그 가운데 함께 계셔서 하나님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방식일 것이다. 소멸되지 않고 정화되고 빚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질문) 당신은 야곱 같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지키심”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지 이해했는가?

   6. 벧엘에서의 엄청난 영적 체험을 목격한 우리는 이제부터 야곱에게 엄청난 믿음의 삶을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하란에서 야곱은 우리의 기대와는 완전 딴 판이었다. 한 우물가에 도착한 야곱은 목자들에게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는지 물어보았다. 놀랍게도 그들이 라반을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라반의 딸 라헬이 지금 그곳으로 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사실 이것만 하더라도 야곱은 “오 주님! 놀랍습니다!”라고 고백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야곱은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라헬과 결혼하게 해 달라는 말을 꺼내기까지, 그리고 그 후 7년의 무보수 노역 동안에도 성경에는 야곱이 기도했다거나 그 입으로 하나님을 언급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창세기 24장의 아브라함의 종에 관한 얘기와 비교해 볼 때 이것은 엄청난 대조를 이룬다. 29장과 24장에 나오는 이 두 사건은 마치 동일한 사건인가 싶을 정도로 유사한데, 단 한 가지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아브라함의 종의 경우, 이삭의 신부를 구하는 과정 내내 기도로 임하고 있다. 이 종은 순적한 길을 위해 기도했고, 누가 신부로 적합한지 인도해 달라고 구체적으로 기도했다. 그 뿐 아니라 이 종의 말에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정이 있었다. 브두엘에게 리브가를 데려갈 수 있게 허락을 요청하는 대목에서도 이 종은 당당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축복을 고백했다. 그곳에 순적하게 도착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우물에서 리브가와 만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다. 자기 주인 아브라함의 재력에 대해 말할 때는 그것은 하나님의 크신 축복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야곱은 어떤가? 청혼 과정에서 하나님을 언급하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으면서도 정작 현실에서는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어떤 고백도 없었다. 현실적 문제와 만날 때마다 야곱의 믿음은 증발되고 말았다. 그러자 그 결과도 완전히 달랐다. 아브라함의 종의 경우에는 브두엘과 라반이 이 종의 확신에 찬 말에 압도되어 어려운 결단을 쉽게 내렸다. 심지어 리브가 본인마저도 즉각 함께 가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야곱의 경우는 어떤가? 라반의 눈에 야곱은 그저 라헬의 미모에 마음을 빼앗긴 한 젊은이에 불과했다. 야곱을 아브라함이 받은 복의 상속자로 취급해 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야곱의 결혼은 오래 걸리고 복잡한 거래가 되고 말았다. 남의 일일까? 우리는 어떨까? 당신은 사람들 앞에 아브라함의 그 복의 상속자답게 말하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야곱보다 복을 덜 받은 자들이 아니다. 우리도 원래 야곱과 같은 야비한 자들이지만 하나님은 야곱에게처럼 우리에게 찾아 오셨다. 그러나 꿈이 아닌 역사 속에 찾아 오셨고, 꿈 사다리가 아닌 십자가로 찾아 오셨다.

질문)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얼마나 그런 은혜를 받은 자로서 살고 있나? 우리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얼마나 있는가? 그리고 기도는 있는가? 그 엄청난 복의 상속자로 살기보다 스스로 “잡사”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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