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_sub17_01.png
조회 수 343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야곱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창 32:24~32)

                                                             2022년 10월 16일 주간목장교안
                                                             20221016 목장교안.hwp

                                                             20221016 목장교안.pdf

❐은혜로운 만남을 위해
①대화를 독점하지 말고 ②골고루 기회가 돌아가도록 배려하며 ③남의 말을 가로막고 끼어들거나 비판하지 말고 ④(힘든 목원이 있을 수 있으니) 자랑을 삼가 주세요.
   
  1. 우리가 반복적으로 들어서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우리가 가진 이 신앙이 이 세상의 다른 종교의 신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다른 신앙은 (너무 단순한 표현이긴 하지만) ‘그렇게 믿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 것을 믿는 것’이다(이 말을 비난조의 말로 이해하지 않기 바란다!). 이 점은 사전이 “종교”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사전들은 종교를 “인간이 ‘존재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초월적 존재나 체계를 믿는 것” 정도로 설명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근본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고민하거나 깊이 사색하던 중에 떠오른 생각(Idea)을 신앙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윤회든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든 말이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가진 신앙이 그것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참 다른 신앙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게 아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렇게 시작되지 않았다. 우리가 믿는 이 내용은 하나님이 그렇게 알려 오셔서 믿게 된 것이지 우리가 생각해 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알려오신 것이다. 처음에는 아브라함에게 자신이 땅의 모든 족속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가진 분이심을 알려오셨다. 그러면서 이를 위해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고 알려오셨다. 그때부터 우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어주신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이해할 자료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실 때 하나님 자신을 오고 오는 세대들에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소개하려고 부른 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 자신이 자신의 약속을 어떻게 취급하시는지, 그 약속에 대해 얼마나 신실하신 분인지를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통해 전해 주셨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은 한 세대의 이야기에 담아 설명하기에는 너무 큰 것이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그들의 세대를 넘어서는 자비하심과 신실하심을 설명하셨다. 당시 야곱은 하나님이 장차 하나님 자신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기를 기뻐하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 46:7).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사기꾼 같은 야곱이 족장 중 하나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였다. 하나님이 야곱을 부르신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나타내기에 야곱이 가장 알맞은 그릇이기 때문이다. 야곱의 야비함과 습관적 거짓말과 탐욕은 야곱이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지를 보여주지만,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어떠한지를 드러내기에 그 무엇보다 합당하기 때문이다. 그런 야곱이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는다면 그 이유가 야곱에게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있음은 저절로 명확해지는 것이다. 이 점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나눔) 당신은 기독교인의 믿음과 다른 종교의 믿음이 본질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했는가? 당신은 그것을 위해 성경이 그들을 불러 그들과의 관계를 통해 이렇게 쓰여 있다는 것에서 무엇을 느꼈는가? 당신이 깨달았거나 마음에 깊이 닿은 것 한두 가지씩 얘기해 보라.

  2. 훗날 하나님이 자신을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할 줄을 야곱은 결코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을 소개할 때, 훗날 세상의 얼마나 많은 야곱들이 자신의 이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기뻐하고 그 마음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마음을 갖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야곱의 이름은 그렇게 사용되었다. 세상의 죄인들은 그 이름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그 이름 안에서 기도할 이유를 발견하고, 그 이름은 오고 오는 세대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마음을 일으키는 이름이 되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허물과 죄로 캄캄한 상황을 맞은 때에도, 야곱에게 야곱의 하나님이기를 결코 그치지 않았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새 힘을 얻었다. 야곱의 이름은 오고 오는 세대 안에서 공감의 키워드(핵심 단어)가 되었다.
질문) 당신은 야곱을 이렇게 묵상할 때 오늘날 우리 또한 그런 은혜로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보는가? 야곱이 당시로서는 이런 것들을 상상도 못했을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우리가 받고 있는 은혜와 사랑을 상상도 못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있는가?

  3. 그런데 야곱 같은 비천한 자를 사랑하셨던 그 하나님은 캄캄한 밤중에 야곱을 찾아오신 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훗날 직접 야곱의 계보 안에 야곱의 후손으로 오셨다. 차마 야곱의 곤경을 외면하지 못하셨던 그 하나님은 이 땅에서 자신의 죄로 인해 오도 가도 못할 상황에 처한 수많은 야곱들을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야곱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때에도 처음부터 져 주기 위해 오셨다. 그래서 자신의 영광을 내려놓고 오셔서 사람들이 자신을 이기도록 자신을 내려놓으셨다. 사람들이 도무지 감당하지 못할 분이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야곱의 엉덩이에 손을 대기만 해도 뼈가 어긋났던 그런 분이 야곱에게 져 주신 것처럼, 바람과 파도도 잔잔케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던 분, 모든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 분이 사람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 모든 것은 이 땅의 야곱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 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1, 1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 분은 오셔서 야곱과 씨름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야곱의 자리에 서서 야곱들을 위해 아버지의 뜻과 씨름하셨다. 아버지가 그 분에게 “이 세상의 야곱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라.”고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그 뜻을 받들기 위해 그 분은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며 기도하며 씨름하셨다. 그 결과 마치 야곱이 그 밤 이후 다리를 절었던 것처럼, 그 분은 십자가를 지셨고 그로 인해 옆구리와 손바닥에 영구히 상처를 입게 되셨다. 하지만 그 분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야곱들은 희망의 밝은 아침을 맞게 되었다. 자신의 죄와 죄의 결과에 빠져 헤어날 수 없었던 그들이 이제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야곱은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으나 살았다.”라고 고백했다. 야곱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도 산 것은 그만큼 의외요, 특별한 은혜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특별한 은혜는 단지 특별한 예외에 머물지 않고, 이제는 모든 사람이 특별한 은혜를 받아 누리는 “길”이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하나님을 뵈었지만 살아남았다고 말하지 않고, 그 분을 뵈었으므로 살았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질문) 하나님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동일한 분이시다. 야곱을 찾아오시고 사랑하신 그 분은 십자가의 그리스도로 찾아오신 그 분이다. 성경의 이러한 연결을 발견할 때 당신이 느끼거나 고백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4.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이름은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이름이지만 그 이름을 모두가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에게 그 이름은 열려져 말할 수 없는 보배를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가 하면 어떤 이에게 그 이름은 도무지 열리지 않은 비밀이다. 그들에게 그 이름은 설명할 길이 없다.
질문) 당신은 그 이름의 비밀을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이름의 비밀이 열린 것에 대해 당신은 감사하는가?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 2022년 10월 16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10.19 343
64 2022년 9월 18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09.22 342
63 2022년 9월 11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09.14 338
62 2022년 11월 20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11.23 323
61 2022년 9월 25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09.28 320
60 2022년 11월 13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11.16 319
59 2022년 6월 26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06.29 318
58 2023년 3월 5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3.03.07 317
57 2022년 11월 6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11.09 316
56 2022년 7월 24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07.27 314
55 2022년 7월 17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07.21 313
54 2022년 10월 2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10.05 312
53 2022년 10월 9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10.12 311
52 2022년 10월 23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10.26 304
51 2022년 7월 3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07.06 299
50 2022년 12월 11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12.14 296
49 2022년 7월 10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07.13 292
48 2022년 10월 30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11.01 291
47 2023년 3월 12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3.03.15 285
46 2022년 11월 27일 목장교안 file 평촌새순교회 2022.11.30 283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