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피(히브리서 12장 22-24절)
2025년 11월 9일 주간목장교안
1. 지난주에는 성찬식이 있었다. 성찬은 하나의 예식이지만 단순한 예식은 아니다. 주님이 친히 세우신 예식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예식이지만, 다른 무엇보다 그 예식이 기억하고 기념하려는 사건의 성격이 다른 기념일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을 추모하는 예식이 아니다. 죽을 수 없는 분의 죽음에 대한 묵상이다. 그것은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던 분의 죽음에 대한 것이고, 물 위를 걸으시던 분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죽은 자를 향해 “일어나라!”라고 명하면 죽은 지 사흘 된 자의 생명도 돌아오던 그런 분의 죽음에 대한 기념이다. 그러니 이 일은 그냥 한 사람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리워하는 추모일과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이 기이하고 신비한 죽음 사건을 좀 더 세밀히 들여다보기 위한 것이다. 게다가 기념하려는 그 사건은 죽음으로 끝난 사건이 아니다. 그분은 살아나셨고 다스리시며,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그러니 성찬은 단순히 어떤 죽음을 추모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논리로도 이해 안 되는 죽음, 죽을 수 없는 분의 죽음을 기억하고 깊이 이해하기 위한 날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에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으며,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 그 일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묵상한다. 죽을 수 없는 분이 죽은 사건이라는 점 하나로도 그 죽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보화를 캐는 시간이 된다.
질문) 당신은 이번 성찬을 어떻게 참여하였는가? 성찬이 반복되는데도 당신에게 새로운 은혜가 있는가? 성찬 설교 초두에 소개된 위와 같은 설명에 당신은 깨달음을 가졌는가?
2. 성찬을 통해 주님의 죽음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 말고 또 있다. 그것은, 이 죽음 사건은 구약 곳곳에 산재하는 예언들이 촘촘히 모여드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몸의 경우에도 신경망이 온 몸에 퍼져 있는데, 그런 중에도 신경망이 가장 발달해 있고, 촘촘히 모여들고 있는 자리는, 신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마찬가지로 성경 예언이 촘촘히 모여드는 이곳은 성경 중에도 가장 중요한 곳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예수의 죽음 사건! 그곳을 세밀하게 살펴보면 우리는 그곳에서 성경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물고기가 바글바글 모여든 곳은 어디에 손을 넣어도 물고기가 잡히듯, 이 죽음 사건 주변을 살펴보면 곳곳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위대한 사랑, 그분의 인내와 정의가 여기저기서 번득이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런 발견은 우리를 더 큰 믿음으로 이끌며, 우리 영혼에 무한한 위로와 용기, 평화와 기쁨을 준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성찬을 위대한 은혜의 방편으로 여겨왔다.
질문) 당신에게 성찬은 과연 그러했는가? 성찬은 당신을 하나님에 관한 더 깊은 진리로 이끌어 주는가?
3. 지난주 성찬을 위해 살펴본 말씀은 히브리서 12장이다. 12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히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 모두가 신앙의 경주를 달려가고 있음을 전제하고, 경주하는 내내 우리의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에 대해 말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라는 말은 믿음의 창시자라는 뜻인데, 이 말은 우리의 믿음이 우리 자신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그분으로 인해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그분이 우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시고, 또 그 열린 눈앞에 그분 자신의 아름다움과 영광과 신뢰받기에 합당하심을 드러내 보여주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에 믿음이 생긴다는 말이다. 우리 안에 믿음은 그런 방식으로 생성되며, 또 성숙된다. 그러니 우리가 이 믿음의 경주를 잘 달려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나? 달려가는 내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말한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렇다면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방의 벽이나 마음에 예수상을 만들어 두고 그것을 계속 바라보는 것일까? 그런 방식은 카톨릭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성당 앞에 성모 마리아 상을 만들어 두고 그것을 지나갈 때마다 인사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성경 계시를 통해 예수님에 관련된 모든 것을 묵상하며 바라본다는 것이다. 죽을 수 없는 그분이 죽게 된 경위가 무엇인지, 그의 죽음은 언제 시작되었으며, 그 일은 왜 필요했고,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살펴보고, 그 일에는 어떤 능력과 지혜가 동원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주님은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참으셨는지 등을 살펴보면서 주님을 묵상하는 것이다.
질문) 당신은 당신의 믿음이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되었고 그분으로 인해 성숙케 되는 것을 인정하는가? 당신의 믿음은 그분의 매력에 점점 더 빠져듦으로 인해 변하고, 깊어지고 있는가? 당신에게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4. 그런데 이렇게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며 예수를 그렇게 바라보면, 우리는 주님으로 인해 어떤 복을 받고 있는지도 알게 된다. 그중에 하나가 예수를 믿어 그분의 백성 된 우리가 이른 곳은 시내산이 아니라 시온산이라는 것이다. 시내산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에 나와서 집결하여 언약을 맺었던 산이다. 그때 하나님은 그 산꼭대기에 임하셨다. 그러자 산은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어 떨었고, 산 정상에는 불꽃과 연기와 뇌성으로 휩싸였다. 하나님은 그 누구도 산에 올라와서는 안 된다며 경고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하며 모세에게 요청했다.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당신이 가서 듣고 와서 말해 달라고 ... 그래서 모세가 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그러자 그들은 다 약속했다. “우리가 다 순종하겠나이다!”라고. 그들은 그 언약을 생명 다해 지킬 것을 다짐하는 뜻으로 짐승의 피를 뿌렸다. 반은 제단에, 그리고 반은 백성들을 향해 ... 그러자 하나님은 그들을 산 위로 초대하셨고, 그들이 산을 올라갈 때 하늘은 맑았고 그들은 그 청명한 하늘 아래서 먹고 마셨다. 물론 좋았을 것이다. 이전에 비해서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하늘 아래서 산으로 올라갈 때 마음에 아무런 불안이 없었을까? 아닐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불안했을 것이다. 산을 올라가면서도 “과연 괜찮을까?” “정말 올라가도 될까?” 하며 불안했을 것이고, 내려올 때도 뒤에서 갑자기 벼락이 치지 않을까 불안했을 것이다. 이게 옛 언약 아래서의 삶이다. 그들은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렸는데, 제사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도 불안했을 것이고, 제사 후 돌아오면서도 불안했을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에 비해 예수로 인해 성도된 신약의 우리는 시내산 아래 모인 자들이 아니라 시온산 아래 모인 자들이라고 한다. 시온산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이 있었던 곳이다. 그곳에서는 그의 피로 새 언약이 세워졌다. 9장에서부터 여기까지 히브리서 저자는 그곳에서 흘려진 피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임을 강조했다. 그 피는 구약 제사에서 짐승의 피와 완전히 다르고 심지어 의로운 예배자인 아벨의 피와도 다르다. 구약의 그 피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그들을 안심하게 하지 못했지만, 시온산에서 흘려진 피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다. 그 피는 아벨의 피와도 너무 다르다. 아벨의 피는 자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신원해 달라고, 그리고 정의를 실현해 달라고 부르짖는 피이지만, 예수의 피는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시나이다!”라고 호소하는 피다. 그 아들의 피가 하나님 앞에 생명 바쳐 호소하는 피인 것이다. 그러니 구약 성도들은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할 수 있었지만, 신약의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간다. 우리는 예배하러 올라갈 때도 담대하게 기대하지만 예배하고 내려올 때도 불안하지 않다. 그것이 신약 성도의 특권이다.
질문) 이번 성찬에서 당신은 당신을 담대하게 하는 피, 그 피를 의지하고 나아갔나? 이번 성찬이 당신에게 그리스도인의 이 놀라운 특권을 더욱 알게 하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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