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교안

2024년 9월 8일 목장교안
2024-09-11 19:07:09
평촌새순교회
조회수   32

어느 포도원 주인의 슬픈 노래 사 5:1~7

 

                                                                                                                                          2024년 9월 8일 주간목장교안

2. 그렇다면 극상품 포도와 들포도는 각각 어떤 맛을 말하는 건가? 7절이 그것에 대해 말한다. “그들에게 정의(공평:미슈파트 טפּשׁמ)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츠다카 חקדצ)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이 바라신 극상품 포도는 정의와 공의가 있는 삶이었다. 정의(공평:미슈파트 טפּשׁמ)란 사회적 제도적 공평을 말한다. 법과 제도의 공평한 운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올바른 사회질서를 말한다. 재판에 유전무죄 무전유죄 같은 일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가난한 과부가 청원한 재판이라도 무시당하지 않으면 그 사회에 공평이 있고, 만약 재판이 당사자의 사회적 지위나 뇌물에 의해 굽게 되면 그 사회에는 공평이 없는 것이다. 그에 비해 공의(의로움 : 츠다카 חקדצ)는 바른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뿐 아니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말한다. 제도를 넘어, 단지 공평함만으로 커버되지 않는 부분들, 사람들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정에 관심과 공감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다. 법과 제도를 공평하게 운용하는 것으로 다 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것으로 커버되지 않는 개별적 사전에 마음을 쓰는 것이다. - 이렇게 하나님은 가나안에 특별히 세운 이 공동체(포도원)에서 정의와 공의 즉 공평과 의로움이 나타나기를 기대했는데 정의와 공의가 아니라 포학과 울부짖음이 가득하더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차원적인 가치관을 담은 사회가 나타나기를 기대하였더니 가나안에 있던 나라들의 모습과 꼭 같은 사회가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탄식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공평과 공의”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기대한 열매의 거의 전부라는 것이다. 이것이 없을 때, 드려진 제사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사1:11-15). 아무리 많이 드려도 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신 것이 무엇인가? 삶이다! 삶의 열매다. 그래서 사1:11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 점은 다른 선지자들의 말씀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 “미6: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모든 선지서에서 동일하게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이 한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삶 속에 정의와 공의가 있는 것이다. 믿는 우리가 이 사회 속에서 올바른 질서를 세우는 일에 앞장서며, 법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법이 커버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돌보면서 공감하는 것, 하나님은 그것을 바라신다. 그런 점에서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을 대표하는 용어다.
질문) 당신은 어떤가? 당신도 하나님 말씀에 따라 때때로 고와와 과부를 돌아보는 일을 했는가? 당신은 이 사회에 올바른 법질서와 법집행을 위해 안타까워 하며 애를 쓴 일이 있는가? 

3. 정의를 바랐더니 포학이요, 이웃의 상황에 공감하는 삶을 바랐더니 도리어 울부짖음이라는 말을 하실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특이하다. “그들에게 미슈파트(정의/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미슈파(ּ포악)이요 그들에게 츠다카(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츠아카(부르짖음)이었도다”라고 하신다. 주님은 여기서 공평과 포학, 정의와 울부짖음을 대비시키면서 고의로 아주 유사한 발음의 단어를 사용한다. 그 유사한 발음이 암시하는 바는 사람들의 죄악이 너무나 교묘하다는 말이다. 그들이 악을 행하되, 마치 아무 하자가 없는 공의로운 일을 하는 것 같이 하면서 악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얼른 보면 선 같은데 자세히 보면 악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절차는 다 지켰고, 그래서 얼른 보면 아무 잘못된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런데 사실은 잔인한 일이요 포학한 일이더라는 것이다. 아무 문제 없는 재판인 것 같지만 사실은 증인도 돈으로 매수했고 재판장도 매수한 것이다. 그래서 그 사회 속에는 울부짖음이 가득해진 것이다. 겉으로 보면 정의가 지켜졌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서는 더욱 악취가 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꿰뚫어보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 당신에게는 이런 일이 없는가? 이 말씀이 당신에게는 어떤 가책을 주는가?

4. 오늘 우리가 읽은 것은 유다왕국의 담을 헐어 보호를 철회하고 외부세력에게 짓밟히게 하게 하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경고다. 그 말씀이 빈말이 아니었음은 역사가 증거하고 있다. 이후 유다는 외세의 손에 무너지고 성과 성전은 훼파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문제는 이것이 그저 남의 일인가 하는 것이다. 결코 남의 일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이사야의 날선 지적은 과거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향하고 있다. 돌아보면 오늘 이 땅의 교회인 우리도 그와 같은 처지가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오늘 우리에게도 위선적인 종교생활만 무성한 상황이 아닌가? 오늘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의 급격한 영향력 상실은 단순히 세상의 비난과 공격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패배에서 비롯된 것 아닌가? 점점 더 감성적인 현장 예배는 개발되고 있으나, 말씀에 입각해서 빚어지는 삶의 예배는 거의 없지 않은가? 오늘 보수교단에 속한 우리는 우리 사회를 정의의 바탕 위에 세워지게 하는 것을 사명이라고 생각한 일이 있나? 준법이 전부이거나, 주일 성수가 전부가 아니라, 법이나 제도로 커버(감당)되지 못하고 있는 개별적 상황을 동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임을 인식하고 있는가? 오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말할 수 없는 긍휼을 입은 우리는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당신의 생각을 정리해 보라.

 

댓글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조회수 첨부 파일
84 2024년 12월 1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12-04 26
83 2024년 11월 24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11-27 24
82 2024년 11월 17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11-20 28
81 2024년 11월 10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11-13 27
80 2024년 11월 3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11-06 49
79 2024년 10월 27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10-30 26
78 2024년 10월 6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10-08 53
77 2024년 9월 22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09-25 43
76 2024년 9월 15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09-18 36
75 2024년 9월 8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09-11 32
74 2024년 9월 1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09-04 42
73 2024년 7월 7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07-16 38
72 2024년 6월 30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07-16 26
71 2024년 6월 23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06-26 522
70 2024년 6월 16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06-19 516
1 2 3 4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