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교안

2024년 10월 6일 목장교안
2024-10-08 16:29:52
평촌새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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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식에 이르도록 돕는 방편들 (히브리서 4장 11-13절)

 

                                                                                                      2024년 10월 6일 주간목장교안

 

 

    1. 두 번의 설교를 통해 매우 중요한 말씀을 나누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늘 실패했던 부분에 대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도 그 구원이 의도하던 진정한 핵심을 누리는 데에는 늘 실패해왔다. 구원의 즐거움은 늘 죄 사함에만 국한될 뿐, 구원 백성들에게 허락된 더 깊은 것, 하나님의 만족과 기쁨과 안식을 누리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다른 표현을 빌자면, 하나님과의 평화는 누리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평강은 누리지 못한 것이다. 광야의 그림으로 설명하자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후 감격에 겨워 엄청난 대합창으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렸지만, 그러나 그 이후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몇 십 년이 가도 그 해변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거기 머물러 있으면서 늘 같은 노래를 부르며 출애굽에 대해 회고하고 감사하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이다. 히브리서 저자의 경고는 우리가 어느 시대나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광야의 이스라엘도 그랬고, 가나안의 이스라엘도 그랬으며, 히브리서 기록 당시의 신약 성도들도 그럴 위험 앞에 서 있었다. 
질문) 그런 점에서 오늘 우리는 어떨까? 당신은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의 상태가 어디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지 말해보자.
나는 내가 ① 비록 믿음은 약하지만 그러나 분명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② 그리스도 안에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도 때로 맛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③ 그리스도 안에는 있으나 그 평강을 맛보는 데까지는 못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➃ 그리스도 안에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2. 히브리서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구원받은 자가 구원을 누리는 상태에는 두 가지 수준이 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어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된 상태, 즉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더 이상 정죄받지 않음을 넘어 하나님의 만족과 기쁨(안식)에 참여하는 상태, 그분의 만족과 기쁨이 우리 영혼을 적시는 상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상태는 각기 거기에 이르는 방식이 다르다. 구별하여 말하자면 전자는 믿음(‘기대는 믿음’)에 의해 이르게 되는 것이지만, 후자는 히브리서가 말하는 대로(3:18, 4:2, 4:6, 4:11) 순종(‘순종하는 믿음’)으로 이르게 된다. 행위가 아닌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아무런 순종 없이 하나님의 충만으로 충만케 됨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마치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넜더라도 (이제 가나안이다!) 그 땅이 의미하던 젖과 꿀(상징적 표현이다!)을 맛보려면 그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워야 했던 정복 전쟁, 비록 그것은 칼로 싸우는 싸움이지만,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것은 순종의 싸움이다. 그 전쟁은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는 싸움으로, 그 땅에서 가나안 사람들이 뿌려놓은 가치관과 문화를 뿌리뽑고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의도하는 사회, 그 가치관과 문화를 심는 싸움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리적으로는 그 땅에 들어온 것이지만, 그 땅에서 순종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따라서 그들은 그 땅에는 들어왔지만, 그러나 그 땅이 의미하던 진정한 것들은 누리지 못했다.
질문) 이것이 당신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당신의 신앙이 어떤 상태인 것 같은가? 당신은 예수를 믿은 후, “예수 믿고 구원 얻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나에게 정죄함은 없다.”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는가? 아니면 당신의 마음 속에 세상적 가치관을 버리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는 싸움을 싸우고 있는가? 아니면 그런 싸움을 싸울 엄두도 못내고 있는가? 싸우고 있다면 주로 어떤 영역에서 당신은 치열한 싸움을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3. 순종의 삶, 순종의 걸음, 결코 쉽지 않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이 세상의 가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가치에 따라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것, 그것은 결코 쉬운 일 아니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고, 또 가나안 전쟁만큼이나 위험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 어려움도 생긴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가?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화합해서 살아가면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그 안식과 기쁨, 만족과 평강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 약속은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으로는 알아지는 게 아니다. 실제 순종해서 어려운 싸움을 싸워 가면, 비록 어려움이 많이 있겠지만, 그 고통과 아픔 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담대한 평강을 맛보게 된다. 그 담대한 평안과 기쁨은 <기대는 믿음>을 통해서가 아니라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서 온다. 정말 신기한 것은 그 고통과 아픔 속에서 진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어디까지 사랑하셨는지, 그분이 무엇을 각오하셨는지 깨달아지는 것이다. 이 고통이 내게 너무 손해가 아닌가 싶으면서도 거기서 하나님의 진짜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너무나 강력한 사랑이어서, 모든 상황을 압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통스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압도하는 평강을 맛보는 것이다. 이것은 참 신비하다. 그런 점에서 그 평강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다. 그런데 순종하지 않고는 알기 어려운 것이고, 순종은 어려움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기에, 그런 점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그 평강과 안식을 맛보지 못한다.
질문) 당신은 이런 평강을 아는가? 이런 평강을 누리는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4. 여러분 모두에게 이 말씀은 쉬운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하자. 순종해서 사는 삶은 단지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차원의 평강과 기쁨을 열어주기도 한다. 그러면 어떻게 순종해서 사는 삶을 살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갑자기 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다고 말하는 걸까?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가 순종함에 있어서 말씀의 도움을 순순히 받으라는 말이다. 말씀이 찌르고 쪼갤 때 반발하거나 거역하지 말고 말씀 앞에 바르게 반응하기를 힘쓰라는 것이다.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도록, 순종하도록 돕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래서 말씀은 은혜의 방편 중에 하나다. 말씀은 죽은 게 아니라 성령 안에서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성령에 붙잡힌 말씀은 가장 예리한 칼인 좌우에 날 선 검보다도 더 예리해서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서 쪼개는 것처럼 우리 마음의 숨은 생각과 동기를 드러낸다. 우리 안에 숨은 가나안이 다 드러난다. 그 앞에 우리는 숨을 수 없다. 우리의 생각은 드러나지 않을 수 없고 우리의 부끄러움이 다 드러날 수밖에 없다. 말씀은 그렇게 우리를 돕는다. 우리 변명의 숨은 동기를 드러내고, 숨은 죄를 드러내고, 그 위선을 드러낸다. 말씀은 겉으로 교묘하게 포장되어 나타나는 나를 드러낸다. 교묘하게 목사로 포장된 나, 장로로 포장된 나, 안수집사로 포장된 나를 드러낸다. 무엇보다 말씀은 신앙으로 포장된 불신앙을 드러낸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필요를 위해 다음의 말씀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다. 그분의 특별함은 그분 앞에 우리는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날 수밖에 없는데, 그분이 또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별한 의미가 된다. 그분은 불꽃 같은 눈동자를 가지신 분이다. 그분 앞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그래서 그분이 심판하시면 감당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 그분 앞에 드러나지 않을 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에게 심판자가 아니라 대제사장이 되시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그분의 용서 또한 철저할 것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말씀과 함께 이런 대제사장이 있음을 굳게 잡으라고 한다(말씀과 기도). 게다가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음이 놀라운 은혜인 것은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실뿐 아니라 동정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공감의 원천인 분이다. 처음부터가 우리의 연약함에 공감하신 분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물론 대속의 제물로 흠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분이 우리가 아는 시험의 가장 깊은 자리까지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험을 받았는데 죄가 없다는 것은 끝까지 죄를 안 지었다는 말이다. 시험의 가장 깊은 것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은 우리가 당하는 시험의 가장 깊은 것을 아신다. 그래서 우리를 계속 도우실 수 있다. 지금도 물론이고, 더 깊은 시험으로 나아가도 거기서도 넉넉히 도우실 분이다. 시험의 모든 단계에서 여러분을 도우실 수 있다. 그래서 그분에게 나아가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위해 그분에게 나아가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보좌 앞으로 나아갈 때, 그때 때를 따라 도우실 수 있다. 어려운 문제나 시험 가운데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막막할 때 하나님이 기도의 시간에 가장 지혜로운 답을 주신 경우가 너무나 많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라는 은혜의 방편을 통해 순종해서 사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질문)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방편인 말씀과 기도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서로 나누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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