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교안

2024년 11월 3일 목장교안
2024-11-06 17:11:02
평촌새순교회
조회수   49

                                             나는 복음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

                                                                                           2024년 11월 3일 주간목장교안

 

 

   1. 지난 주는 세례주일로, 우리는 세례주일에 신앙의 기본되는 말씀을 듣는다.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바울이 굳이 자신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는 당시 그리스도인에게는 복음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자신이 예수 믿는 것을 나타내기를 망설이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질문)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당신이 기독교인임을 사람들 가운데 드러내는가? 당신의 주변 사람들은 당신이 예수 믿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는가?

   2.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끄러워할 만한 상황이 많이 존재했다. 우선 당시 기독교는 불법이었고, 기득권의 종교가 아니라 노예와 천민과 약자들의 종교였다. 당시 그것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믿을 종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의 종들이 밤이면 어딘가를 다녀와서는 자기들끼리 즐거워하는 어떤 것이었고, 물으면 누구 하나 제대로 답을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누군가 좀 똑똑한 종이 있어 설명을 한다 해도, 그 내용은 로마인이나 헬라인이 보기에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종교적 상징물(십자가)은 괴이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처형당한 자를 숭상하고 예배한다느니 ...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 그들의 눈에는 십자가가 거기서 무슨 지혜가 나올 종류의 것도 아니고, 세상을 정복한 영웅의 이야기도 아니지 않은가? 그것은 그저 처형당한 루저(Loser, 패배자)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을 조롱하는 벽화가 난무하곤 했다. 사람들이 격분하며 조롱하고 거부할 이유는 또 있었다. 그것은 복음이 사람을 죄인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아니 심지어 단순히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넘어, ‘아무 소망이 없는 자’라고까지 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단언하며, 심지어 열린 무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아직 자신의 실상을 발견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터무니없는 모욕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복음이 제시하는 구원의 방법은 또 어떠한가? 인간의 도덕적 노력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 아니던가?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믿는 것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하다니 ... 이 또한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터무니없이 비도덕적인 주장처럼 들리는 것이다. 선행이나 덕을 쌓는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게 아니라 너의 선행과 덕은 너를 구원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인데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튼 불신자들에게 복음은 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늘 조롱과 공격을 받아왔고, 그래서 늘 부끄러울 수 있는 처지였다.
진단) 당신은 오늘날에도 이 복음이 얼마나 조롱받기 쉬운 것인지 생각해보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이 복음을 믿는 당신의 신앙이 부끄러웠던 적이 있는가? 왜 그랬다고 생각하는가? 왜 당신은 당신이 믿는 이 복음에 대해 당당하지 못했는가? 당신의 마음을 진단해보라.

   3. 바울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복음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비록 복음으로 인해 세상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려고 온갖 시도를 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내게 복음이 부끄러운 것은 아닙니다.” 왜? 왜 그럴까? 사실 복음이 부끄러운 것은 복음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음을 알면, 복음이 부끄럽지 않다. 왜냐하면 그 복음에는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 가지 방향에서 나타난다. 
   첫째, 그 십자가 사건이 어디서 시작되었고, 어떻게 마침이 되었는지를 보고 나면 정한 때, 정한 방식으로 일어나는 그 모든 과정 자체가 엄청난 지혜와 능력인 것을 알게 되고, 그 지혜와 능력이 우리를 위해 동원된 것을 알게 된다. 이 세상 어느 구원이 이런 엄청난 능력으로 받는 구원이 있겠는가?
   둘째, 동일하게 그 과정을 살펴보되, 초점을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삶에 맞추어 살펴보면 또 다른 것을 보게 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택하신 자들의 삶이 모두 실패인 것을 본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사건이 예정한 대로 일어난 것은, 택하신 자들의 모든 도덕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은 하나님의 집념의 승리임을 본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십자가는 그냥 십자가가 아니다. 그것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그러니 그 십자가를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셋째, 바울이 이 십자가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지금도 이 복음의 이야기는 그것을 듣고 믿는 자들 가운데 구원의 능력으로 경험되기 때문이다. 나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 얻는 이것, 내가 행한 것이 아닌 하나님이 행하신 것으로 구원을 얻는 이것은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에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
질문) 당신은 복음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복음이 부끄럽지 않을 만큼 복음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우리의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국 구원의 승리를 이루시는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지금 이 구원의 능력을 경험하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와도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기에 감사할 수 있겠는가?

댓글

댓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등록일 조회수 첨부 파일
84 2024년 12월 1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12-04 26
83 2024년 11월 24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11-27 24
82 2024년 11월 17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11-20 27
81 2024년 11월 10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11-13 27
80 2024년 11월 3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11-06 49
79 2024년 10월 27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10-30 26
78 2024년 10월 6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10-08 53
77 2024년 9월 22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09-25 43
76 2024년 9월 15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09-18 35
75 2024년 9월 8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09-11 31
74 2024년 9월 1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09-04 42
73 2024년 7월 7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07-16 38
72 2024년 6월 30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07-16 26
71 2024년 6월 23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06-26 521
70 2024년 6월 16일 목장교안 평촌새순교회 2024-06-19 516
1 2 3 4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