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호기심이 아니었다 (창세기 3장 1-7절)
2024년 12월 1일 주간목장교안
1. 본문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다. 창세기의 이 부분은 우리가 왜 이렇게 고난으로 가득한 삶을 살게 되었는지, 왜 인생은 다들 이 모양인지, 그것을 말해준다. 성경은 그것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다. 사실 인생이 고통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혹 현재 상황이 좋은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런 사람의 경우조차 그 편안함은 얼마 남지 않은 편안함이다.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설교자가 특별히 비관적인 사람이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인생을 깊이 관찰한 불교에서도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했다. 이렇게 인생이 고난의 연속임은 누구나 알 수 있는데, 문제는 인생이 그렇게 된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불교는 그것을 집착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들 마음속의 갈애(渴愛), 갈망이 모든 아픔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이런 깨달음들을 열반에 이르게 하는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라고 한다.
질문) 당신은 인생이 고통이고 고난임을 절감하는가? 당신은 아직은 편안한 줄에 서 있는가?
2. 깨달음이 거기에 이르면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집착을 벗어나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더러는 산으로, 더러는 마음 선원으로 간다. 불교와 기독교의 근본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는 인간의 집착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데에서 그치지만, 기독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왜 이렇게 집착하는 존재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 더 제기한다. 하지만 불교는 이런 질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들로는 이런 질문은 대답이 없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어떤 과정에 의해 시작된 존재는 그 시작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명제가 그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하지만 기독교는 완전히 다른데, 그 이유는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그 시작으로부터 말해 주실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태초부터 계셨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창세기에 모든 것의 시작이 - 세상의 시작, 인류의 시작, 민족의 시작, 죄의 시작, 고통의 시작 등 - 들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왜 이렇게 타는 목마름을 갖게 되었는지를 말해 줄 수 있다. 창세기는 그런 점에서 인생이 왜 이처럼 고통스럽게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그래서 언젠가 인생의 한계와 고통을 절감하는 사람들이 고통 중에 그들의 고통에 대한 대답을 듣게 하려는 것이다.
질문) 당신은 성경으로부터 “예수 잘 믿으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는 메시지를 듣는가? 아니면 인간의 삶에 왜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설명을 듣는가?
3. <선악과> 사건은 인류가 왜 고통 속에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한 열매를 따 먹은 게 원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그렇구나!”하고 수긍하기보다 오히려 “그걸 왜 거기 두었단 말이냐?” “과일 하나 먹은 것 아니냐?” 하면서 반발하거나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선악과는 괜히 거기 두어서 문제가 된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하면 인간이 가장 인간답게 살 수 있는지, 그 바른 위치를 가장 쉽게 설명해주는 장치다. 동산의 모든 열매가 그들에게 마음껏 누리도록 허락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복 받은 존재이며 자유로운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그런 상황에서 선악과는 인간 영광의 한계에 대한 기억 장치, 인간의 바른 위치를 생각나게 하는 장치다. “인간은 그토록 위대한 존재이지만 <절대자유자>는 아니다.”라거나 “<절대자유>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 인간은 위대하지만 하나님과 같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글로 쓰면 대단히 길고 복잡한 논술이 될 수 있는 진리를 <동산에 허용된 모든 과일과, 금지된 단 하나의 과일로> 설명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위대하나 하나님 아래 있으며, 자유하나 절대자유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탄의 유혹은 바로 그 지점을 노리고 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금했는데, 그것을 금지한 이유는 네가 완전히 자유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야! 그가 그것을 금한 이유는 자기만 완전 자유이기를 원하기 때문이야!” 이런 식으로 유혹한 것이다. 그러니 그런 유혹에 반응하여 그것을 먹은 것은 그저 하나의 열매를 먹은 게 아니라 이제 고분고분 하나님 아래 있지 않겠다는 중대한 결심을 표명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그 열매를 따 먹었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창 3:22). 과연 정말로 선과 악을 아는 일에 그들이 하나님 수준이 되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피조물이 그렇게 될 수도 없거니와, 그런 일이 무얼 먹어서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말씀은 과일 속 영양소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 그것을 먹기로 결정한 그 행동이 의미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탄의 유혹처럼 이제 그들이 하나님처럼 선과 악에 대한 최종 판단자 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큰 불행의 뚜껑을 여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결정은 그럴 자격과 실력이 있는 자가 하면 큰 복이 되지만, 그럴 자격이 없는 자, 그럴 위치에 있지 않은 자가 하게 된다면 그 자체가 불행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불행이 일어날 것인가! 그래서 하나님은 서둘러 그들을 에덴 밖으로 내보내신다. 여기서 선악과는 인간이 무엇인지, 인간의 바른 위치,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수 있는 길을 가장 쉽게 설명한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자칫 많은 책을 읽어야 알 수 있을 그것을 누구나 알 수 있게, 그리고 누구나 알 수 있게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제시해놓은 것이다. 그냥 거기에 나무를 심어 놓고 그것만 먹지 않으면 되도록 해 놓은 것이다. 그것은 지키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냥 안 먹으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과일이 다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이니 그들이 그 열매를 꼭 먹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상황에서 먹었다는 것이 중대한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고의적인 결단이 아닐 수가 없고, 그 의미는 단지 한 가지로만 읽힐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인, 자신의 위치를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죄의 근본 속성은 교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눔) 우리는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들었다. 인간의 고통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그 가장 깊은 원인으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가? 옛날 일인데 그러나 무언가 여러분의 마음에도 공명이 일어나는 무언가가 있다고 느끼지 않는가? 그와 꼭 같은 교만, 그와 꼭 같은 선택이 오늘도 당신 안에 있다고 느끼지 않는가? 한 해의 마지막 달인 오늘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자. 지금 내 마음은 하나님처럼 높아져 있지는 않는가? 그렇지 않아도 고통으로 가득한 삶을, 더욱더 고통스러운 삶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는가? 최근에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지 않고 그저 보기에 좋고 그럴듯한 대로 행했던 일이 있다면 그것을 말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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