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삶을 성찬에 적시라 (고린도전서 11장 17~34절)
2024년 11월 10일 주간목장교안
1. 지난 주는 성찬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다. 성찬 예식 설교의 본문에서 바울은 좀 화가 난 상태였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는 이렇게 말한다. “고전11: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그는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교회 안에서의 처신 때문이다. 사람들의 처신이 도저히 교회답지 않은 것이었다. 당시 교회 내에는 사회적 신분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힘이 있고 신분 있는 사람들이 종과 같이 낮은 사람들의 사정을 배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종처럼 신분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안중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만찬을 하는 날에 종들이 하던 일을 마치고 교회로 가 보면 만찬은 거의 다 끝나고 남은 것은 박한 음식이나 찌꺼기 같은 음식만 남아 있곤 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예배와 식사의 교제를 사모하며 달려왔는데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고 만찬은 이미 다 끝나 버린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미 배불러서 식탁에서 물러나 앉아 있고 어떤 사람은 포도주를 너무 마셔서 취해 있는 상황이었다. 어려운 여건인데도 허겁지겁 달려왔는데, 아무도 챙겨주지도 기다려주지도 않는 그 상황, 그것은 그들에게 엄청난 소외감과 비참함을 주었을 것이다. 자신들과 같은 것들은 와 봤자 아무 것도 아닌 그런 교회라고 느꼈을 것이다. 바울이 마음 아파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너희가 일상생활(만찬)을 이렇게 하고 성찬을 할 수 있나 ... 이런 모임이라면 차라리 안 모이는 게 더 낫지 않나 하는 거다.
질문) 당신은 당신의 처신 중에 이 부분에 해당하는 경우는 없었나(남의 얘기 아닌 자기 얘기)? 교회 생활 중에 이런 일로 눈살을 찌푸린 적은 없나?
2.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끄러워할 만한 상황이 많이 존재했다. 우선 당시 기독교는 불법이었고, 기득권의 종교가 아니라 노예와 천민과 약자들의 종교였다. 당시 그것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믿을 종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의 종들이 밤이면 어딘가를 다녀와서는 자기들끼리 즐거워하는 어떤 것이었고, 물으면 누구 하나 제대로 답을 못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누군가 좀 똑똑한 종이 있어 설명을 한다 해도, 그 내용은 로마인이나 헬라인이 보기에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종교적 상징물(십자가)은 괴이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처형당한 자를 숭상하고 예배한다느니 ...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당시 그들의 눈에는 십자가가 거기서 무슨 지혜가 나올 종류의 것도 아니고, 세상을 정복한 영웅의 이야기도 아니지 않은가? 그것은 그저 처형당한 루저(Loser, 패배자)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을 조롱하는 벽화가 난무하곤 했다. 사람들이 격분하며 조롱하고 거부할 이유는 또 있었다. 그것은 복음이 사람을 죄인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아니 심지어 단순히 죄인이라고 하는 것을 넘어, ‘아무 소망이 없는 자’라고까지 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단언하며, 심지어 열린 무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아직 자신의 실상을 발견하지 못한 자들에게는 터무니없는 모욕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복음이 제시하는 구원의 방법은 또 어떠한가? 인간의 도덕적 노력이 아니라 오직 믿음이 아니던가?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믿는 것을 통해 구원을 얻는다고 하다니 ... 이 또한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터무니없이 비도덕적인 주장처럼 들리는 것이다. 선행이나 덕을 쌓는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게 아니라 너의 선행과 덕은 너를 구원할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것인데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아무튼 불신자들에게 복음은 잘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늘 조롱과 공격을 받아왔고, 그래서 늘 부끄러울 수 있는 처지였다.
질문)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지금 교회 안에서 돌봄을 받고 있는가? 몇 년째 돌돔을 받고 있는가? 당신도 이제는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3. 이 본문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성찬예식 자체가 중요하기보다, 그 예식 전에 우리가 성찬의 정신과 일관성이 있는 삶을 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늘 성찬의 거울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예식 자체를 잘 준비하는 데에 신경을 쓴다. 포도주는 어떻게 담고, 잔은 어떻게 보관하고, 남은 포도주와 떡은 어떻게 폐기처분하고, 성찬 위원은 누가 되는지 등에 마음을 쏟는다. 물론 다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것 아무리 잘 해도 우리의 삶이 성찬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성찬의 음료를 포도주로 해야 하나 포도즙으로 해야 하나 ... 이런 것을 따지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질문)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예식을 거룩하게 거행하는 것은 잘 하면서도 우리의 삶 속에 성찬이 있게 하는 것 ... 우리의 삶이 그 성찬에서 우러나오게 하는 것은 잘못하고 있지 않나?
4. 바로 그런 점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해 준 게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한다.
고전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바울이 전해 준 것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내어주신 그리스도다. 영광의 주님이 낮아지고 우리에게 친구가 되신 것, 자신의 생명을 제물로 내어주신 것, 그것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고 성찬을 제정해 준 것이란 말이다.
질문) 바울의 권면에 따라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모일 때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고 인정하는가? 당신은 모일 때마다 늘 자기류와만 교제하고 있지는 않나? 그리고 우리는 남이야 어떻든 자기를 자랑하고 자식을 자랑하며 온갖 것으로 자기를 과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떤 방식으로든 남에 대해 자신의 우월감을 느껴보려 하고, 그래서 괜스레 다른 사람을 좌우하려 하지 않는가? 그런 당신은 과연 성찬의 정신과 관계가 있을까?
5. 성찬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죽으심을 전하는 그 일은 그저 빵과 포도주를 나누면 저절로 되는 게 아니다. 아무리 예식이 멋있어도 우리 각자가 성찬의 정신으로 살기를 힘쓰며, 성찬의 거울 앞에서 자신의 삶과 태도를 다듬을 때, 끝없이 예수님의 죽음을 교회의 중심에 두려는 그 모습이 없으면 주님의 죽으심은 선포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성찬에 임할 때 먼저 자기를 살피라고 요구한다. 나의 처신, 나의 삶의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에게 합당한가? 묻는 시간을 가지라는 말이다. 이 말은 스스로 돌아보고 적합하지 않은 일이 생각나거든 참여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살펴서 자신의 삶의 문제를 더 깊이 살펴보라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이 성찬이 얼마나 자신에게 필요한지를 깊이 깨달으라는 것이다. 자신을 살피다 보면 작년 이 시간에 고백했던 죄들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발견할 수도 있다. 참 좌절스런 발견일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는 성찬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게 아니라, 그 성찬이 바로 자기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주어진 것을 깊이 절감하면서 그 성찬의 주님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이렇게 자기를 살필 때, 우리는 성찬을 받기에 합당하게 준비된다. 그런 것이 없이 그냥 무심하게 성찬을 먹고 마시면 어떻게 될까?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한다.
고전11: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자기 죄를 돌아보거나 뉘우침 없이, 성찬을 먹고 마시면 ... 그 성찬은 그들의 죄를 그대로 놔 둔채, 그냥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려는 것이니 그것은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것과 같게 된다. 바울에게 이것은 용납될 수 없는 태도인 것이다.
질문) 올해 당신의 성찬은 어떠했는가? 당신은 성찬 예식 때에 자신을 생각하며 자격 없다고 생각하여 성찬 받기를 주저한 경험이 있는가? 오늘 당신은 자신을 살피다가 주저하기보다 오히려 더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는가? 성찬에 관한 당신의 의식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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